한겨레 21
등록 : 2017-04-03 18:21
1월26일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선언 장소는 서울 여의도동 국회의사당에 위치한 ‘국회 헌정기념관’. 이곳은 대한민국 의정 역사와 국회의 역할·활동상을 담은 기록물을 보관·전시하는 공간이다.
상징적이었다. 그는 2015년 7월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직 사퇴 기자회견에서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헌법 제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201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공천에서 배제되자 당을 떠나 무소속 출마를 선언할 때도 헌법을 언급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민권력을 천명한 우리 헌법 제1조 2항입니다. (…) 저는 헌법에 의지한 채 저의 오랜 정든 집을 잠시 떠나려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정든 집’에 돌아와서도 헌법을 우선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2016년 12월27일 국회의원 28명과 함께 발표한 분당선언문에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사상 최악의 헌법 유린”으로 규정했으며, “(당내) 친박 패권 세력은 헌법 수호를 위한 동료 국회의원들의 노력을 배신과 패륜으로 매도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의 헌법과 가치를 목숨처럼 지키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따뜻한 공동체를 실현할 새로운 보수 정당을 세워가겠다.”
‘기울어진 운동장’ 평평하게 바꾸려면
‘개혁 보수’의 기치는 공약에 고스란히 반영됐다(아래 표 참조). 복지·노동·사회·재벌개혁 분야는 시민사회 요구안을 끌어안은 측면이 많다고 평가받는다. ‘최저임금 1만원’과 ‘비정규직 채용 제한’ 등은 보수정당 후보에게서 볼 수 없던 공약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한 운동장으로 만들겠다”고 표현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이하 민주노총) 정책실도 최근 발표한 이슈페이퍼 ‘대선 (예비)후보 공약 비교 분석’에서 유 후보의 공약 방향을 대체로 긍정 평가했다.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려는 방향 설정과 정책 실효성을 높이려는 패키지안 마련은 노동단체 입장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수 공약은 아직 재원 마련 계획과 관련 법제도 개선의 구체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광재 한국매니페스토실천본부 사무총장은 “뉴스에만 ‘가짜 뉴스’가 있는 게 아니다. 공약을 평가할 때 ‘가짜’(fake)라는 단어를 쓴다. 입법으로 가능한 공약은 입법안이 구체적으로 나와야 한다. 유 후보가 공공보육시설을 얘기하는데 중앙정부 재원만으로 가능한지 등이 나와 있지 않다. 구상 단계여서 완결성이 떨어지는데, 국가 자산과 부채를 어떻게 함께 운용할지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노동삼권(헌법이 보장한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보장에 대한 고민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한국의 노조 조직률, 단체협약 적용률은 10%대에 불과하다. 노동권이 적극 보장되지 않으면 유 후보가 제시한 공약이 제도화해도 현장에서 실현되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 후보와 마찬가지로 아직 당 차원의 공식 공약집이 나오지 않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쪽은 ‘노조할 권리, 노동삼권 실현과 관련한 공약/정책’을 묻는 민주노총 정책질의서에 대해 초기업 단위 단체협약 효력 확장, 조례나 지침에 의한 단협 개악 금지, 정리해고와 정부 정책 등에 관한 쟁의권 보장 등을 내놓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박근혜와 제대로 이별하는 법
이창근 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유 후보가 보수 후보 가운데 상당히 진전된 면이 분명 있다. 하지만 헌법에서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와 집단적 노사관계 영역 얘기가 거의 없다. 아직 공약 준비가 안 됐는지 알 수 없으나 비정규직 문제 등이 워낙 심각하니 시혜적으로 접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원조 친박’ ‘부역자’ 딱지가 붙은 과거를 제대로 청산할 필요도 있다. 유권자가 유 후보의 공약 실현 의지와 능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 후보는 2000년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가 발탁해 정치에 입문했으나, 2005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비서실장직을 시작으로 주요 시기를 박근혜와 함께했다. 같은 해 재·보궐 선거에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부탁으로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하고 지역구에 출마하는 ‘무리수’를 강행했다. 2011년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재선거에서 패배한 뒤 박근혜를 중심으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후 박근혜와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었고 결국 ‘찍어내기’에 이르긴 했지만, 그가 비선 실세의 존재와 국정 농단 가능성을 “몰랐다”고 해명하는 말을 믿기는 쉽지 않다. 그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뒤 “사람 보는 눈이 부족했다” “박근혜 정부를 탄생시킨 책임” “새누리당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언급하는 수준에서 잘못을 시인했다. “바른정당에 와도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내가) 정치하는 끝까지 따라다닐 것”이란 말도 했다.
하지만 사과와 해명이 언론이나 유권자가 먼저 질문했을 때 답변으로 짧게 언급되는 수준이라, 유 후보와 박근혜가 가까웠던 시기에 대한 의문을 해소하기는 쉽지 않다.
이광재 사무총장은 “민주적 선거는 후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유권자가 듣고 싶은 얘기에 응답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유권자는 탄핵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듣고 싶어 하는데 그에 대해 (유 후보가 답변을) 피하는 것 같다. 미국유권자연맹에서는 후보가 이런 행태를 보일 때 ‘노이즈’(소음)라고 한다. 후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건 가공 정보일 뿐, 유권자에게 필요한 정보가 아니라서 걸러낸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유 후보가 내놓은 사회복지, 사회공공성 분야 공약을 긍정 평가한 민주노총 정책실은 이슈페이퍼에서 “(유 후보가) 복지 공약을 거의 이행하지 않은 박근혜 정부의 핵심 정치인이라는 측면에서 기대와 우려가 공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창근 정책실장은 “지금까지 내놓은 공약은 당내 경선 과정에서 발표한 것인데, 대선 후보로 확정된 만큼 앞으로는 당의 입장과 개인 입장을 조율해야 한다. 그런데 바른정당 소속 하태경 의원만 해도 새누리당 시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당 간사로서 최저임금법 개정을 반대했다. 유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법 개정은 대통령 개인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그 사람을 배출한 당의 입장이 중요한데, 바른정당 입장은 어떨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어대문’ 대 ‘ABM’ 구도 넘어서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과 ‘ABM’(Anyone But Moon, 문재인 아닌 누구든). ‘문재인 대세론’과 ‘반(反)문 연대’ 가능성을 표현하는 온라인 대선 키워드다. 유 후보의 정책·공약보다 그가 자유한국당 후보 또는 국민의당 후보와 ‘반문 단일화’할 가능성을 점치는 보도가 압도적으로 많다. <한겨레21>이 접촉한 전문가들은 유 후보가 더 이상 특정 인물의 성(姓)을 둘러싼 구도에 휩쓸리지 말고 개혁 보수와 공화주의 가치를 지켜나갈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안병진 경희대 미래문명원장은 유승민 후보가 보수적 공화주의 이론, 개혁적 보수주의 기치를 내걸었다는 점에서 미국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과 유사하다고 했다. “만약 유 후보 같은 개혁 보수가 늘고, 이들이 한국의 기존 리버럴 세력과 전환기 한국의 새 패러다임을 놓고 경쟁·협력한다면 지금의 저성장기 터널을 극복할 가능성이 열릴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러한 가치를 유지하면서 영향력을 높일 수 있느냐이다.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적폐 청산이지만 다음 대선은 누가 안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하느냐가 될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집권하는 세력이 성공한 정권이 되기는 쉽지 않다. 그렇다면 대중은 개혁 보수에 기대를 더 높게 가질 수 있다. 개혁 보수가 성공할 수 있는 맥락은 이미 무르익은 걸로 봐야 한다.”(안병진 원장)
유 후보가 2016년 미 대선 때 트럼프를 지지한 매케인처럼 더 ‘우경화’할 가능성은 없을까. “유승민 후보의 2015년 국회 연설은 국내 정치인 중 가장 기념비적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세계경제와 한국 경제 상태가 주류 경제학자 입장에서도 ‘지속 가능한 경제정책’을 주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유 후보의 ‘경제는 진보, 안보는 강경’ 기조는 세계적 조류와 유사한 측면이 있어 우려스럽다. 도널드 트럼프, 아베 신조, 시진핑과 비슷하다. 한반도 비핵화 방안 등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 발표가 필요하다.”(구갑우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