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2014년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은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와 대치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여 헌법이 운용되어야 함을 밝혔다. 백낙청에 따르면 이 사건은 헌법 이면에 또 다른 헌법의 존재가 공식화된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권리는 ‘분단’을 고려해서 제한될 수 있음을 천명한 것이다. 법이 그 사회 모럴(moral)의 지표임을 감안할 때, 이면헌법의 존재는 바로 이면모럴의 작동을 의미한다.
모럴(도덕·도의·윤리)은 사회를 통합하는 힘이며, 사회적 관계 구성의 지침이다. 모럴은 특정한 행동규칙과 가치들로 개인을 규율하게 되며, 개인은 이를 내재화하면서 비로소 윤리적 주체가 된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은 바로 모럴을 지키려고 몸부림치고 동시에 이에 다다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윤리적 수치심으로 자신을 성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동체의 약속이면서, 선악의 기준이 되는 보편적인 모럴은 한국적 “특수한 상황”을 고려한 분단의 모럴 앞에 쉽게 무너진다. ‘친북’, ‘공산당’은 절대 악이고, ‘빨갱이’에게는 인권도 권리도 없다는 논리가 바로 그것이다. 분단의 모럴은 평범한 시민들에게 지켜야 하는 절대적 가치 및 행동규칙으로 각인되며, 성실하고 착한 대부분은 그 도덕률에 맞춰 생각하고 행동하려 애쓴다.
최근에 등장한 ‘태극기’들은 전형적으로 분단의 모럴을 수행하는 ‘시민’들이다. “젊은것들이 뭘 알아. 전쟁이 나서 공산당에게 나라가 먹혀봐야 안다고…” 외치는 노인에게는 부정의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도, 세월호 인양을 요구하는 것도,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려는 것도 다 ‘북괴’의 지령을 받고, 한국을 북한에 바치려는 술책일 뿐이다. 이들에게 ‘자유’란 반공, 반북과 다름 아니고, 국가는 절대적이며, 박근혜 전 대통령은 범접할 수 없는 ‘대통령 마마’가 된다. 이들에게 분단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이 ‘사람’이며 ‘사회적 존재’임을 확인시켜주는 모럴이 바로 분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극기’들을 단순한 맹신에 빠진 소수 집단의 일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지난 70여년 동안 한국 사회에 존재해온 이면모럴로서 ‘분단’의 작동을 주목해야 한다.
게다가 분단의 모럴은 노인 계층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세대, 젠더(성별), 지역을 가리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유력 대선 후보는 인생사진으로 특전사 시절의 모습을 들이대며 안보관을 내세우는가 하면, 또 다른 후보는 현 상황을 국가 전복 사태로 규정하며, 종북좌파를 섬멸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좋은 예이다. 이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든 분단의 모럴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간파한 정치권의 값싼 정치 전략이라고 하겠다. 이렇게 해서 표를 얻으면 뭘 하겠는가. 분단이 선악 구분의 기준이 되고, 사회 구성원의 행동지침과 가치가 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사람’의 공동체를 꿈꾸는 것도, 정의롭고 공정한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데 말이다.
이제 우리는 바로 이면모럴로 작동하는 ‘분단’의 문제에 반기를 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신자유주의의 파고 앞에서 흐릿해져 버린 공동체의 가치와 타자의 윤리를 회복하는 것이다. 분단의 논리에 자리를 내준 채 몇몇 ‘답답한 원칙주의자’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정의로운 사회라는 가치의 회복이 중요하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속에 똬리를 틀어, 진정한 윤리적 고민을 방해해온 분단의 모럴을 사회적 연대와 정의로 대체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모두가 광장에 모여 꿈꾼 새로운 사회의 본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