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7.03.22 / 1080호(p38~39)
2월 13일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 위원장 겸 국무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국제공항에서 암살된 후 국제 외화채권시장에서 ‘북한채권’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북한채권은 과거 북한이 서방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해 발행한 채권으로, 그동안 한반도 정세 변화에 따라 예민하게 움직여왔다.
2011년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때도 북한채권이 주목받았다. 당시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T)’과 로이터 통신은 ‘북한국채에 몰려드는 투자자가 늘고 있다’며 ‘북한이 빌린 돈의 원금은 6억5000만 마르크와 4억5500만 스위스프랑(당시 미국 달러로 환산하면 9억4100달러, 한화로는 약 1조8000억 원)가량 된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에서 발표한 북한채권 가격 추이.
북한 채무는 김정은이 태어나기도 전인 1970년대 후반에 이뤄졌다. 당시 김일성 주석이 서방은행으로부터 신디케이트론으로 약 10억 달러를 빌린 것. 신디케이트론은 여러 은행이 공동으로 빌려주는 돈으로, 북한 대출에는 140여 개 은행이 참여했다. 당시 오일머니를 주체하지 못하던 서방은행은 주로 남미, 동유럽 국가들을 상대로 신디케이트론을 내줬고 때마침 북한에게도 기회가 돌아갔다.
하지만 북한은 1984년 3월 채무불이행(디폴트)을 선언했고 그때부터 이자도 지불하지 않았다. 그러자 3년 뒤인 87년 서방은행은 북한을 상대로 영국 런던의 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북한을 ‘세계 최악의 채무국’으로 간주하며 ‘채권자들의 유일한 희망은 런던금속거래소에 매물로 나와 있는 북한의 금과 은을 압류하는 것 뿐’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실제로 서방은행이 북한의 금과 은을 압류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채권공사를 발행 주체로 채권을 발행하기 시작한 건 1997년부터다. 프랑스 BNP파리바은행이 ‘북한으로부터 빚을 받을 권리’를 헐값에 사들인 뒤 북한의 빚 중 일부인 4억 달러(약 4000억 원)를 유동화해 채권을 발행한 것. 만기까지 이자가 지급되지 않는 제로쿠폰채였는데, 2010년 3월 만기가 도래하자 채권자들은 2020년까지 만기를 연장했다.
그렇다면 북한채권 가격은 어떻게 결정될까. 현재 북한채권 호가를 제공하는 곳은 미국 ‘웨스브루인 캐피털(Wesbruin Capital)’로 알려졌다. 또한 채권 거래를 대행하는 곳은 특수채만 취급하는 영국 ‘이그조틱사(Exotic Limited)’다. 국제금융센터(KCIF) 금융시장실 한 관계자는 “북한채권은 여타 외화채와 비슷한 형태로 거래된다. 외화채권은 개인투자자도 살 수 있으나 주로 대형 펀드운용사가 구매한다”고 말했다.
유명 금융기관 중에서는 미국 자산운용사 프랭클린템플턴투신운용이 북한채권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기준 프랭클린템플턴투신운용의 신흥시장채권펀드는 북한채권 전체 원금의 45% 이상인 약 4억2500만 달러(약 4819억 원)를 보유하고 있다.
2011년 KCIF가 발표한 ‘북한채권 가격 상승세 지속 배경’에 따르면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당시 액면가가 달러당 20센트 선을 기록하던 북한채권은 2007년 6자회담 합의 당시 26센트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2008년 북한이 6자회담 합의를 번복하면서 4센트까지 떨어져 그야말로 ‘정크(쓰레기)’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러다 201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는 30센트까지 가격이 급등했다. 현재는 10센트 내외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국내에도 북한채권을 보유한 개인이 더러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금융업 관계자는 “최근 고액 자산가 사이에서 이색 대체 투자가 각광받으면서 북한채권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올라가고 있다. 우리나라 증권사나 은행에서는 북한채권을 정식으로 판매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개인은 해외 브로커를 통해 매입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예탁결제원 측도 “(회원사인) 국내 증권사들로부터 북한채권 구매를 위탁받은 적이 없다. 현재 국내에서는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얘기와 같다”고 밝혔다.
1997년 우리 정부는 북한채권 매입에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남북교류협력법)을 적용해 사전승인을 받게끔 했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국내 대기업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유통되는 북한채권을 대거 사들인다는 사실을 확인한 통일원(현 통일부)은 “앞으로 국내 기업이 북한채권을 매입하면 정치적·경제적 측면에서 남북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 남북교류협력법을 적용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현재 법제처 국가법령정보센터에 올라와 있는 ‘남북교류협력사업 처리에 관한 규정’을 보더라도 제3조(용어의 정의) 1-가 조항에는 ‘남과 북의 법률에 의해 인정된 대외지급수단, 외화증권 및 외화채권 또는 이의 교환으로 생기는 투자지역 내의 지급수단, 증권 및 채권은 통일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대해 통일부 관계자는 “아직까지 북한채권 거래와 관련해 승인된 사안은 없다”고 밝혔다.
자칫 휴지조각이 될지도 모르는 북한채권이 오랜 세월 국제금융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남북통일’ 가능성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은 통일 당시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의 채무를 승계해 갚아줬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학 교수는 “통일한국이 과거 북한 정부의 권리 의무를 승계해야 하느냐는 법리적으로 논란이 있다. 하지만 통일이 어떤 형태로 이뤄지든 통일한국이 북한 지역을 포괄할 경우 권리 의무도 당연히 승계해야 한다는 논리가 더 우세하다. 그렇기에 북한이 불안정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통일이 임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북한채권 가격이 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10센트 안팎인 북한채권을 사두면 통일한국이 북한채무를 떠안아 액면가(1달러) 그대로 변제했을 때 수익률은 자그마치 900%에 달한다. 하지만 이건 ‘김칫국부터 마시는’ 계산법이다. 북한채권 투자자에게도 투자 책임을 물어 통일한국과 채권변제의무를 나눠 갖는 차원에서 ‘헤어컷’(손실분담)이 이뤄질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그 비율을 ‘7 대 3’ 정도로 본다. 이 경우 수익률은 200% 정도로 떨어지는데, 물론 이것도 낮은 수치는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통일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느냐다. 양문수 교수는 “학자에 따라 견해가 다르겠지만, 아직 통일은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각에서는 통일 후 비싸게 ‘통일비용’을 지불하느니 지금부터라도 정부가 북한채권을 사 모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통일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다”고 밝혔다.